푸른게시판 참경제칼럼

[시사인:생활경제보건소 21] 쓰느냐, 버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푸른살림 2017.03.17

[시사인:생활경제보건소 21] 쓰느냐, 버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필요한 것 다 사고 돈도 많이 모으고 싶다?

욕심이다. 다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없다. 경제활동은 결국 ‘선택’이다.

[322호] 2013년 11월 08일 (금) 23:04:40

박미정 (여성이만드는일과미래 생활경제상담센터장) webmaster@sisain.co.kr

A씨는 시어머니 소유의 4층짜리 상가 건물을 관리하는 일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지하층은 노래방, 1층은 호프집, 2층은 PC방, 3층은 개조해서 고시원식 원룸 임대, 4층은 가족이 사는 집이다. 최근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매출이 급감한 상가들은 ‘임대료 내려면 빚이라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볼 때마다 우는소리다. 2층 PC방 사장은 남편과 친구 사이인데, 사정이 어렵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해서 3개월째 월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안 지하층 노래방과 1층 호프집도 월세를 내지 않았다.

건물 유지 관리를 위한 기본비용은 물론이고 대출이자와 4층에 사는 5인 가족 생활비도 월세로 충당하는 상황인지라 이는 곧바로 위기로 이어졌다. 시어머니께서는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사정 봐줘가며 어떻게 월세를 받느냐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2층 밀린 월세부터 받아내라고 역정을 부렸다. 온순한 성품의 부부는 이 상황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돈을 받아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 사는 게 돈이 전부는 아닌데…. 저희 부부는 그냥 시골 내려가서 살고 싶을 뿐이에요.”

나중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 건물을 팔고 그 돈으로 시골에 내려가 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이 건물 팔고, 5남매 몫으로 나누고 나면 푼돈만 남아요. 게다가 매달 나오는 임대료 수입이 없어지면 저흰 뭘 먹고 살아요?” ‘임대업’ 하며 돈돈 거리는 것은 싫은데, ‘임대 수입’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참 이상한 논리다. 그런데 어쩐다? 이 부부는 본의 아니게도 임대업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라 보인다. 임대수입의 구성 성분인 월세조차 세입자들에게 제대로 못 받으니 말이다.

A씨는 한 달에 수백만원씩 임대료를 받으면서도 씀씀이가 지나치게 알뜰한 시어머니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재 심한 관절염으로 통원 치료를 받는 와중인데도, 기어이 4층 계단을 오르내리고 택시 한 번 타는 적이 없으시다. “솔직히 저희 시어머니는 너무 돈에 집착하시는 거 같아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고 사시나 몰라. 동네 사람들이 다 그래요. 돈 한 푼 거저 쓴 적이 없는 지독한 늙은이라고. 저 같으면 저렇게는 안 살겠어요. 사람이 좀 쓸 데 쓰고 누릴 줄도 알아야지,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말이죠.”

무엇을 얻을까와 무엇을 포기할 것이냐의 문제

그래서인지 A씨 부부 수중에는 모아둔 돈이 없다. 다 짊어지고 갈 게 아닌 돈을 지금 필요한 곳에 잘 쓰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돈이 있는데도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이라기보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돈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둘 중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하긴 어렵다. 본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어서다. 다만, 나는 현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돈을 썼으므로 수중에 가진 돈이 없는 것이고,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필요한 것도 덜 사는 대신 돈을 가지기로 한 것인데, 결과만을 놓고 단순 비교해 “누구는 얼마 모았다는데 왜 나는 돈이 없나”라고 장탄식하는 것은 참 이상한 셈법이다. 그 돈이 잘 쓰여 좋은 체험과 소중한 추억이 많이 쌓였다면 돈을 갖고 있는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일 텐데, 돈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건가?

돈을 남기든, 추억을 남기든 본인의 선택에 만족한다면 평안할 것이다. 물론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대가만 감당할 수 있으면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임대료 수입을 유지하려면 악착(?)같이 월세를 걷어야 할 것이고, 그런 삶이 싫다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임대료 수입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식’을 넘어서서 뭔가 둘 다 가질 수 있는 ‘비결’을 도모하려 할 때 우리는 뭔가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불행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선택’은 어떤 것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임과 동시에 무엇을 포기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해서 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