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생활경제보건소 22 ] 우리 가족 ‘연비’는 얼마?
국가나 회사는 지출하기 전에 예산을 작성한다.
가정에도 ‘소비예산’이 필요하다. 어디에 얼마를 쓸지 미리 결정하는 ‘훈련’이 중요하다.
A씨 남편은 재작년에 승진해 급여가 인상되었다. 얼음 나오는 정수기도 새로 들여놓고, 벼르고 벼르던 냉동고도 하나 샀다. 10년도 넘게 탄 낡은 차도 아이들과 함께 놀러가기 좋은 신형 SUV로 바꿨다. 형편이 좀 나아지니 뭔가 살아가는 때깔도 달라지는 것이 삶에 여유가 생기는 듯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또다시 여유가 없다. 물가가 많이 올라서?
고작 1년 사이 물가가 올랐으면 얼마나 올랐겠나. 문제는 새로 들여놓은 물건들이 제각각 제몫의 비용까지 끌고 들어와 생활비를 늘린다는 데 있다. 정수기는 렌탈료 외에도 전기요금과 필터 교체 등의 관리비가 들고, 냉동고도 역시 대기전력을 높이는 주범이다. 차량 할부 및 유지비용 역시 만만치 않은 고정비용이 되어 생활비를 높인다. 한번 산다고 지출이 끝나는 게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사치를 했다거나 과소비를 한 것도 아니다. 삶의 비용이 높아졌다고 해서 형편이 크게 어려워지는 것도 아니다. 당장 돈벌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우선은 필요한 대로 쓰고 살게 된다. 이렇게 저축 없이 살아도 괜찮을까 싶지만, 남편 소득이 줄어들거나 하면 어떡하나 싶지만, 뭐 아직 벌어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써야 할 데 쓰며 사는 건데 괜히 줄여야 한다며 스트레스받지 않으려고요. 있으면 있는 대로 쓰는 거고, 없으면 없는 대로 덜 쓰고 살면 되죠. 뭐하러 미리부터 걱정하며 살아요?”
느닷없이 A씨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지지만 않았어도, 그리하여 희망퇴직 형태로 불시에 퇴사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흐르는 대로 살면 되는 거였다. 지속 가능한 소득이 아니다 보니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으레 안고 산다 생각했던 대출이자와 각종 고정비용들, 심지어는 아직 10년 더 남은 연금저축까지 몽땅 삶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뭔가 많든 적든 꾸준한 소득원이 있을 때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식상한 말은 이제 와서야 절실한 삶의 금언이 되었다.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는 일. 이것이 재무 설계의 시작일 것이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지금 여력을 일부 떼어 ‘가뭄’에 대비한 일종의 ‘저수지’를 만들어두는 일이다. ‘비’라는 것이 때에 맞게 내려주면 호시절이 되지만, 자연의 섭리는 그렇지 않다. 한 번 왕창 쏟아져버리거나, 오래도록 비 소식이 없어서 가뭄에 이르거나 한다. 비가 많이 내리든 적게 내리든 필요한 물을 평상시에 저수지에 잘 저장해두어 삶의 안정을 꾀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소득도 비와 마찬가지다.
불행히도 사람은 겪지도 않은 일을 미리 대비하며 사는 위대한 존재가 못된다. 돈이 없어서 못 쓰고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는데도 안 쓰고 사는 것,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고로 어떤 금융상품에 얼마를 저축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목적자금 설계보다, 실제로 지금 얼마 벌어 얼마를 쓰고, 얼마를 떼어 우리 가정의 안전망과도 같은 ‘저수지’를 비축해두느냐 하는 ‘균형’ 문제가 재무 설계의 가장 근본 문제다.
얼마 벌어 얼마 쓰고 얼마 저축할지 ‘수지균형’ 파악이 중요
그러려면 결국 ‘수지균형’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얼마 벌어 어디에 얼마 쓰고 사는지 우리 가족의 삶의 기본 비용, 즉 ‘연비’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한 달에 얼마 정도를 어디에 쓰고 살 수 있는지 알아야 미리 ‘소비예산’이라는 것을 정할 수 있다. 회사도 국가도 지출이 이루어지기 전 예산이라는 것을 작성한다. 예산에 따라 결산을 해보면서 미래를 결정한다. 이 예산은 그 조직의 핵심 철학이기도 하다. 복지에 더 많이 쓸지, 교육에 더 많이 쓸지의 배분율이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철학을 반영한다.
일반 가정만이 아무 기준점 없이 그냥 ‘필요’로 둔갑한 ‘욕망’을 채우는 소비를 결산하며 살아간다. 예산 없이 결산 중심으로 살다 보면 지출 반성만 하게 되어 소비의 만족도를 갉아먹고 소비 자체를 줄이기도 어려워진다. 어디에 얼마 쓸지를 미리 결정해야 우리 가족 삶의 연비를 미리 책정할 수 있다. 이제 이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을 온 가족이 ‘훈련’해야 한다.